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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최초의 한국인 사진사, 박만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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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최고관리자 조회 1,526회 작성일 23-03-2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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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최초의 한국인 사진사, 박만달



대구에서 처음 사진관 영업이 시작된 것은 1904년 경부선 철도가 놓여지고 대구에 일본인들이 들어올 무렵이다. 1910년대까지는 東洋軒, 南韓寫眞館, 星島寫眞館, 近藤寫眞館, 伊藤寫眞館, 獨立軒寫眞館, 佐藤寫眞館, 三光軒寫眞館 등 대부분 일본인들의 영업사진관이었다. 


대구에서 한국인이 경영하는 영업사진관은 1917년 10월 무렵 서성정(서성로네거리 부근)에서 있었던 애선사진관(愛鮮寫眞館)이 처음으로, 사진관주는 박만달이다. 그가 어디에서 어떻게 사진기술을 습득하여서 영업사진사가 되었는지, 언제부터 대구에서 사진관을 개업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현재로서는 그가 대구 최초의 한국인 사진사이다. 초상사진의 촬영이 대중적으로 보급되었던 1920년대 이후에는 대구에도 影美軒(1922, 최유택), 永福(1924, 서정복), 大角(1926, 최재호), 文化(1926, 최해곤), 高等(1927, 배일우), 南星(1928, 진두성), 日光(1930, 오여송) 등 한국인이 경영하는 영업사진관과 한국인 사진사들이 크게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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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 명동관서 열린 경성사진사협회 제3회 총회 때의 기념사진. 두 번째 줄 맨 왼쪽 박만달 씨

(일간스포츠, 1977. 9. 23)



우리나라에서 박만달보다 먼저 사진관을 열고 영업을 한 한국인 경영의 영업사진관은 경성(서울)의 천연당사진관(1907, 김규진)과 평양의 기성사진관(1912, 천연당사진관의 분점) 정도밖에 없었다. 1920년에는 5월 금옥당사진관, 7월 금광당사진관(김광배)이 경성에서 개업하였는데  금옥당사진관이 개업할 때 '경성에서 조선 사람이 경영하는 유일한 사진관'으로 소개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인의 사진업 진출은 매우 드물었던 시기이다.  


대구 애선사진관 박만달은 1921년 10월 무렵에는 대구의 중심부인 상정(경상감영로 일대)으로 진출하여 영업하고 있었는데, 조양회관을 건립한 대구 유지 서상일의 초상사진에 대한 불만과 대금문제로 시비가 벌어지면서 그의 집에 놀러왔던 흥해 부호 편동현으로부터  명예훼손으로  대구경찰서에 고소되어 대구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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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고소까지, 쓸데없는 사진 때문에 고소까지 되었다”(매일신보 1921. 9. 14)


 '대구 상정 애선사진관 주인 박만달은 수 개월전에 대구부 시장정 서상일이라는 사람의 사진 한 장을 찍어 가지고 서씨에게 사진대금을 청구하러 갔었든 바 서상일씨가 사진이 잘못되었다고 힐난을 하던 중, 그 옆에 놀러왔던 경북 영일군 흥해면 부호 편동현이라는 사람이 있다가 말하기를 “그 사진은 과연 잘되지 못하였소. 나라도 그만큼 찍겠다”고 하므로, 박씨는 크게 분개하며 말하기를 “이 사진이 잘되고 못 되는게 너에게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것이 곧 영업방해가 아니냐”고 설왕설래가 되어 서로 힐난을 하던 끝에, 박 사진사가 편씨의 낯에 침을 뱉고,  “더러운 놈과는 말을 아니 하겠다”하고 온 일이 있었는데, 편씨는 다수 공중의 안전(眼前; 눈 앞)에서 이와 같은 모욕을 당함은 명예에 관계가 된다 하여 대구 경찰서에 고소를 제기하였던바, 그동안 대구지방법원 검사국까지 넘어가서 심리를 마치고 不日間 대구지방법원 공판에 부친다더라. (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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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사진관에서 최승희를 모델로 한 촬영회 후 기념사진(1930) 박만달 촬영, 
앞줄 왼쪽부터 김광배 신낙균 최승희 뒷줄 왼쪽 두 번째 박필호 (출전: 박주석, 2021, 한국사진사)  



이후 박만달은 1920년대 후반에 경성으로 옮겨가 종로경찰서 입구에서 독립사진관(獨立寫眞館)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1926년 창립한 한국인 사진사의 친목단체인 경성사진사협회의 임원과 사진강습회 강사로서 활동하였다. 1920-30년대 경성사진사협회에서 박만달과 활동한 적 있는 사진가 박필호는 1970년대 일간스포츠에서 사진가 임응식과 한 대담기사에서 아래와 같이 구술하고 있다.


  「박만달은 종로경찰서 입구 2층 목조건물에서 독립사진관을 경영하였고, 대구출신으로 자기 주장이 매우 분명하였으며, 그의 부인은 애국 여성단체인 조선부인회 회장을 지내고 있어 요시찰대상으로 꼽혔던 인물이었다. 1935년 무렵 사진관 2층 꼭대기 사방에 돌아가며 ‘독립사진관’이란 간판을 달아 경찰서 안에서는 물론 멀리서도 보이게 하였다. 이에 경찰서 측이 상호를 바꾸라고 요구하였으나 일본인 단골손님까지 드나드는 영업장의 상호를 바꿀 필요가 없다고 맞서면서  끝내 고집을 부려 해방될 때까지 그 간판을 그대로 붙여놓고 영업하는 것을 봤습니다」 


그러나 해방될 때까지 독립사진관 간판을 그대로 붙여놓았다는 박필호의 구술과 달리 박만달의 독립사진관은 1937년 당국(경찰서)의 제재로 인하여 부득이 사진관명을 박만달사진관으로 바꾸었다.  


                       “勤苦, 愛護하시든 獨立寫眞館은 今般 當局의 制裁로 不得已한 事情上 館名을 本人의 名, 朴晩達寫場으로 改名하는

                        同時에 平素의 愛護를 報恩코저 改築擴張하고 設備完備하엿사오니 倍前愛護하심을 伏望하나이다(廣告). 

                        京城 鐘路 電(光)五九八番 朴晩達寫場 謹白 (『조선일보』 1937.10.23 )” 


 '근고, 여러분들이 많이 이용해주시는 독립사진관은 이번 당국의 제재로 부득이한 사정상 상호를 본인의 이름, [박만달사장]으로 개명하는 동시에 평소의 애호를 보답하고자 개축·확장하고 설비 완비하였으니 더 많은 이용 바랍니다.(광고) 경성 종로 전(광)598번 박만달사장 근백'